나의 이야기

막작골에 살 때

두부장사 2011. 11. 30. 23:00

막작골에서 살 때


            강 희 영


막작골 이름이 희안하다. 막작골... 마지막으로 삶에 지친 사람들이  쉬어가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싸이판 에서 사년 정도 살다 사과박스 일곱 개를 들고 귀국하여서 정착하였다. 보증금 백만 원에 월 이십 오만원의 사글세방이었다. 그 집은 한옥 집으로 미음자로 지어졌는데 방문 앞에 수도가 있고 바로 옆에는 방앗간 기계가 있었다. 다른 방에 사는 사람들이 수돗가에서 물을 틀고 말을 하고 일을 하는 모든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방앗간의 기계가 돌아갈 때에는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창문에서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잠을 깨곤 했다. 아들 방은 마당으로 나가서 사랑방 형태로 있었다. 화장실은 대문을 나가서 아들 방 옆에 붙어 있는 상태이다.  초등생이던 아들은 학교 친구들을 절대로 안 데려왔다. 너무나 힘든 상황이지만 감사한 것은 힘든 상황에 싸이판 에서 그래도 가족이 생명을 지니고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했다는 마음이다. 그 당시에 경제가 어려워서 싸이판 에는 야반도주하는 한인들이 날마다 생겨나던 시절이다. 아니면 너무 신경을 써서 쓰러져서 한국으로 실려 오고 아니면 죽어서 한국에 묻히는 동포들이 늘어나는 어려운 때였으니.  IMF 경제 한파가 몰아치던 때였으니. 누울 방과 이불과 숫가락만 있으면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래도  힘든 때이니 부부싸움도 잦았다. 너 때문에 이민을 가고 재산을 다 없앴다는 남편의 질책과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부부 싸움을 하면서 참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방안에 틀어 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만 자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는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되었다. 우리 안집은 할머니가 혼자 사셨다. 남편은 돌아가시고. 그리고 친정 딸도 혼자 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사위는  막내가 백일 무렵 교통사고로 죽고 혼자 산지 어느새 이십여 년이다. 글자 그대로 방앗간 쌍과부집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남편과 싸움을 하는 내게 내면의 소리는 너는 그래도 싸울 남편이 있으니 감사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랬다. 불평하면서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싸우는 상황에서 나만 바라보지 말고 옆에도 바라보면서 남을 배려하라는 음성이었다. 나는 그 뒤로 나의 현실을 받아드리고 감사하면서 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투자이민을 가게 되었고 재산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온 뒤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하고 나라를 옮겨가면서 모험을 하였던 젊은 날. 멋모르고 결행을 감행하였던 이민생활. 물론 그 뒤의 생활은 십여 년이 지나도 회복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도전하는 정신을 심어 주고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회를 주었다. 비행기 표만 달랑 사주고 미국으로 보낸 딸은 알바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지금은 졸업을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들도 육 개월 전에 누나 옆으로 보냈다. 그 아이도 그곳에서 적응을 하면서 알바를 하면서 어학연수를 하며 이제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다. 그곳은 기회의 나라여서 젊은이들이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 무모한 첫 도전을 한 엄마의 용기 덕분에 아이들이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도 감사하면서. 우리 집의 현실은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자녀를 멀리 미국으로 떠밀어서 혼자 살아가게 한 것은 나의 지난날의 어려운 결정이 오늘날 자녀들에게 주는 유산이 되었다. 물질로는 뒷받침을 못하지만 어려워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었으니 . 육십을 넘긴 남편과 육십을 바라보는 나는 그러나 꿈을 잃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는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보증금 천오백에 십 육 만원의 임대료를 내는 국민임대에. 너무나 어려운 현실에서 낙담하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기를 바란다. 훗날 오늘의 고난이 내게 유익이었노라고 고백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 어려움을 겪고 나니 마음의 그릇이 넓어져서 남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